1. 만세길방문자센터

소재지 | 화성시 우정읍 화수동길 163

우정읍 화수리의 오래된 보건소 건물을 리모델링해 조성된 방문자센터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2019년에 문을 열었습니다. 이곳은 1919년 4월 13일의 치열했던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공간이자 만세길 스탬프 투어를 시작하는 지점입니다. 만세길 방문자센터는 화성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공간으로서, 벽돌로 채워진 실내 벽면에는 화성 독립운동가 한분한분의 이름이 새겨져있습니다. 리모델링 이전 건물 자재일부를 살려 원래 존재했던 벽에 새로운 벽을 쌓아 올려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공존하는 공간에서 방문객들이 100년전 이 땅을 지키기 위한 결의와 희생을 떠올리도록 해줍니다.

편의시설 | 버스정류장, 화장실, 주차장, 스탬프함

2. 차희식 집터

소재지 | 화성시 우정읍 구슬2길 39-13

차희식(車喜植, 1884.12.17.~1938.11.8.)은 우리 민족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려는 3.1운동의 정신을 이어가고자 1919년 4월 3일 우정·장안지역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마을 주민들의 동참을 이끌어 냈습니다. 이로 인해 일제경찰은 차희식을 우정·장안지역 만세시위 주동자로 여기고 검거했습니다. 일제 경찰에 체포된 차희식은 ‘소요, 살인,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되어 옥고를 치르고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습니다. 정부는 차희식의 공훈을 기려 1968년, 건국 훈장 독립장을 수여했습니다. 현재 우정읍 주곡리에 위치한 차희식의 집터에는 그가 살던 생가의 원형은 남아있지 않고 1945년에 건립한 것으로 보이는 집 1채가 있습니다.

편의시설 | 스탬프함

3. 차병혁 생가

소재지 | 화성시 장안면 버들안길 44-7

차병혁(車炳爀, 1889.12.11.~1967.2.4.)은 우정·장안지역의 만세운동 당시 각 마을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낸 인물입니다. 그는 만세시위의 계획을 듣고 마을의 구장 차병한(車炳漢, 1885.11.12.~1933.2.22.)과 함께 아침 일찍 장안면사무소로 갔습니다. 차병혁은 시위하는 군중이 장안면사무소를 포위하기 전에 먼저 그곳에 도착하여 면장과 면서기에게 만세운동시위에 참여시키는 등 만세시위를 주도했습니다. 이로 인해 차병혁은 우정·장안지역의 3·1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확정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습니다. 정부는 차병혁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습니다. 차병혁의 생가는 화성지역에 위치한 다른 독립운동가의 경우와 달리 유일하게 보전되어 있습니다.

편의시설 | 스탬프함

4. 개죽산 횃불 시위터

소재지 | 화성시 장안면 수촌리 1107

우정·장안지역의 연합 만세시위가 일어나기 2일 전인 4월 1일 저녁, 수촌리의 개죽산을 시작으로 쌍봉산, 남산, 천덕산, 무봉산 등 화성지역의 각 산봉우리에서 일제히 횃불이 치솟았습니다. 총 10개의 산봉우리에서 횃불시위가 진행되었는데, 이는 야간 산상횃불시위(구릉이나 산 위에서 횃불을 들고 벌이는 만세시위의 한 형태) 라는 새로운 형태의 시위로 발전했습니다. 비교적 적은 수의 인원이 거주하고 있던 마을의 주민들은 평지에서 만세시위를 벌일 경우 일제 경찰에게 쉽게 제압당하였습니다. 이를 극복할 대안으로 일제 경찰의 활동이 어려운 야간에, 산 위에서 만세시위를 진행하게 됩니다. 개죽산에서의 횃불시위는 수촌리 인근 마을 주민들의 독립 의지를 드높이고, 우정·장안지역의 사람들이 3·1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편의시설 | 스탬프함

5. 백낙열 집터

소재지 | 화성시 장안면 방축말길 60

백낙열(白樂熱, 1865.12.20.~1937.7.4.)은 장안면 수촌리의 구장으로 활동하면서 우정·장안지역의 3·1운동을 주도한 인물입니다. 구장으로서 마을 주민들의 만세시위 동참을 이끌어 냈을 뿐만 아니라 삼괴지역의 천도교 지도자로서 천도교도 다수의 참여를 이끌어 냈습니다. 실제로 만세시위 직후 일제 경찰들의 조사심문이 시위 참여자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을 때 다수의 사람들은 백낙열을 시위의 주도자로 지목했습니다. 이를 통해 백낙열은 우정·장안지역 만세시위를 지휘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정·장안지역의 3·1운동 이후, 일제 경찰은 백낙열을 찾기 위하여 백낙열이 살았던 수촌리를 수차례 수색하였고, 검거에 실패하자 수촌리에 보복을 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정부는 이러한 백낙열의 공훈을 기려 2002년에 건국 포장을 수여하였습니다.

편의시설 | 스탬프함

6. 수촌리 (수촌교회)

소재지 | 화성시 장안면 수촌큰말길 32

우정·장안지역에서 3·1운동이 일어날 당시 수촌리 마을 주민들도 동참하여 일제의 식민통치에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수촌리에는 일찍이 천도교구와 예수교구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각 종교구의 지도자들은 적극적으로 나서며 마을 주민들에게 시위에 동참할 것을 독려하였습니다. 이에 수촌리 마을 사람들 다수가 만세운동에 동참하였고 일제 경찰은 만세운동 주동자를 검거한다는 명목으로 수촌리를 집중적으로 공격했습니다. 이 때 수촌리 마을에 위치한 민가 42채 중 38채에 불타는 등 상당한 피해를 받았습니다. 수촌리 마을에 위치한 수촌교회는 우정·장안 만세운동에 참여한 전도사와 다수의 교인들을 배출했습니다. 1905년 교인 김응태의 주도하에 정창하의 집에서 교인 7명이 모여 예배를 본 것을 계기로 창건되었습니다. 이후 1907년에 초가집 15칸을 매입하여 예배당을 만들었습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만세시위를 진압하던 일제 경찰이 마을 전체를 방화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이때 수촌교회 예배당도 불타게 됩니다. 현재 수촌교회 옆에 세워진 초가집 형태의 교회는 1987년에 복원한 것으로, 1919년 당시의 불탄 교회는 아닙니다. 1919년 소실된 수촌교회의 위치는 현재 수촌교회 앞에 있는 개인주택 터로 추정됩니다.

*산상(山上)횃불시위: 구릉이나 산 위에서 횃불을 들고 벌이는 만세시위의 한 형태

편의시설 | 주차장,버스정류장, 스탬프함

7. 옛 장안면사무소터

소재지 | 화성시 장안면 어은리 133-5

1919년 4월 3일이 만세시위가 일어난다는 소식을 들은 우정·장안의 마을 주민들은 장안면사무소 앞으로 집결하였습니다. 주민들은 장안면장 김현묵에게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였습니다. 면장 김현묵은 사람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회유하지만, 우정·장안지역 사람들은 계속 모여들며 세가 커지자 강제로 만세운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세가 왕성해진 군중은 만세를 외치며 면사무소의 서류 및 집기류를 밖으로 내동댕이쳤고, 사무소 건물을 부쉈습니다. 뒤이어 사람들은 쌍봉산으로 향하여 만세운동의 장소를 넓혀나가자 이때 제일 뒤에서 행렬을 따르던 무리가 면사무소에 불을 지르게 되고, 면사무소 건물이 완전히 파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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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쌍봉산

소재지 | 화성시 우정읍 조암리 산55-17

쌍봉산은 우정읍과 장안면 사이에 있는 해발 117.7m의 산으로, 산 정상에 서면 우정·장안 두 지역의 전체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쌍봉산은 두 개의 봉우리가 솟아 있어 ‘쌍봉산’이라고 이름 붙여졌는데, 1919년 4월 3일 우정·장안지역의 주민들은 두 개의 봉우리 중 남쪽 봉우리에서 만세를 외쳤습니다. 당시 쌍봉산은 흩어져 있던 각 마을 주민들이 집결한 장소였고, 집결한 인원은 초반 300명에서 금세 불어나 1500명까지 늘어났습니다.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행렬을 이어나갔습니다. 이렇듯 쌍봉산은 우정·장안지역의 주민들이 연대하여 만세시위와 산상횃불시위를 벌였던 곳으로서, 오늘날에도 화성지역 만세운동을 상징하는 장소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편의시설 | 주차장, 버스정류장, 화장실 스탬프함

9. 조암리

소재지 | 화성시 우정읍 조암리 340-13

조암리는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로, 예부터 우정·장안지역 주민들의 생활 중심지였습니다. 1919년 4월 3일, 쌍봉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조암리를 거쳐 우정면사무소로 이동하여 면사무소를 파괴하였습니다. 일제는 만세시위에 보복하고자 조암리 마을에 있는 큰 집들만 골라 불을 질렀습니다. 이에 가옥 10여 채가 불에 타는 등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편의시설 | 주차장, 버스정류장, 화장실 스탬프함

10. 김연방 묘소

소재지 | 화성시 우정읍 밤밭일원길 65-8

김연방(金然昉, 1881.7.21.~1919.4.13.)은 1905년 을사늑약 때 낙향하여 교육운동에 힘썼으며, 1919년 3·1운동이 전개되자 그가 사는 우정·장안지역의 만세운동을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일제는 우정·장안지역 만세운동에 대한 탄압과 보복을 자행하던 시기에 김연방의 집안을 공격했습니다. 김연방의 99칸 종가집을 모두 불태우고, 당시 집에 있던 김연방에게 총을 쏴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현재 김연방의 묘소 옆에는 ‘삼일독립운동순국추모비’를 세워 그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고 있으며, 정부는 김연방의 이러한 공훈을 기려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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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옛 우정면사무소터

소재지 | 화성시 우정읍 화산리 559-2

1919년 4월 3일 오후 3시경, 쌍봉산에서 내려온 1,500여명의 사람들은 우정면사무소에 이릅니다. 시위대가 면사무소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면장 최중환과 면서기들은 도망간 상태였습니다. 사람들은 몽둥이를 들고 현관 입구의 유리창을 깨고, 14평정도 규모의 초가집인 면사무소 건물을 돌과 몽둥이로 부수며, 서류상자, 탁자, 의자 등의 집기와 서류 등을 면사무소 앞쪽 밭에 내던졌습니다. 그리고 사무소 건물과 집기 및 서류들을 모두 불태웠습니다. 현재 우정면사무소 건물은 1919년 만세시위 당시 파괴되어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으며, 현재 그 터는 밭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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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각리, 죽리

소재지 | 화성시 우정읍 한각리 202-1

만세운동을 펼치던 시위대는 우정면사무소에서 시위를 마친 뒤 화수경찰관주재소로 향하여 이동할 때 지나간 마을입니다. 죽리에는 당시 우정면장인 최중환의 집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우정면장을 만세시위에 동참시키기 위해 그의 집을 포위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피하고자 최중환은 군중이 이동할때까지 계속 숨어있었고, 그의 늙은 아버지만 남아있자 군중은 발걸음을 옮겨 한각리 광장으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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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한각리 광장터

소재지 | 화성시 우정읍 한각리 568-1

우정면사무소를 파괴한 이후 사람들은 화수경찰관주재소를 향해 이동하였습니다. 각 마을에서 만세시위에 동참하기 위한 주민들의 집결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용의주도하게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기 위해서는 전열을 가다듬을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한각리 언덕의 광장에서 잠시 쉬며, 주재소를 습격할 계획을 세웁니다. 한각리 광장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후 사람들은 두 패로 나뉘어 동쪽과 서쪽으로 주재소를 습격해 나갔습니다. 화수경찰관주재소로 향하는 길에는 20여명의 사람들이 띠를 동여매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앞장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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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최진성 집터

소재지 | 화성시 우정읍 한뿌리1길 119-7

최진성(崔鎭成, 1903~1972)은 한각리 마을 사람들과 함께 뒷동산에 올라 횃불시위를 전개하고, 우정·장안 연합만세시위에도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주도자 색출을 명분으로 삼아 수색작전을 펼치고 한각리에 들어와 최진성의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물이 귀하던 시절, 일제가 놓은 불이 번지자 마을 사람들은 힘을 합쳐 최진성의 집 장독대 안에 있던 간장까지 꺼내어 불을 껐다고 합니다. 현재 최진성의 집은 타고남은 가옥 일부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당시에 탄 자국이 남은 기와와 독 파편들이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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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화수리 주재소터

소재지 | 화성시 우정읍 화수동길 145

일제강점기에 순사가 머무르며 경찰사무를 맡아보던 기관으로, 만세시위 당시 군중에 의해 집중적으로 공격당했습니다. 만세를 외치던 시위대는 저녁이 다 되어갈 무렵 일제히 화수경찰관주재소에 도착하였습니다. 당시 화수경찰관주재소에는 1명의 일본인 순사와 3명의 조선인 순사보가 근무 중이었습니다. 시위대가 주재소를 에워싸자 순사보 3인은 황급히 건물 밖으로 나와 도망쳤으며,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는 주재소 건물 내부에서 동태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시위대 중 몇 명이 주재소 뒤쪽으로 가 뒷벽 주변에 있던 빈 가마니에 불을 지르자, 그제서야 가와바타는 주재소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가와바타는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며 달아났습니다. 가와바타가 쏜 총에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장안면 사곡리의 이경백이 맞아 순국하였습니다. 총을 발포한 이후 가와바타는 주재소 북쪽의 뒷산으로 도망갔습니다. 군중은 그를 뒤쫓았고, 뒷산에서 가와바타 순사를 처단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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